헬조선을 거부한 순왜

캠퍼스타운 | 2016/06/26 22:59 | 조회 306 | 추천 0 | 반대 0

순왜(順倭)
: 임진왜란 초반 부 일본군은 아무런 저항없이 손쉽게 한양에 입성했음.
그 이유는 양반들에게 착취 당하던 조선의 하층민들이 일본군에 협조 했기 때문.
더 자세한 내용은 위키백과를 참조 할것. 

왜 백성들은 일본군을 도왔나?


실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초기만 해도
일반 백성(상민과 노비)들은
일본군을 반기는 분위기였다.


가혹한 봉건적 수탈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경우
딱히 일본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조선왕조를 미워해
일본군의 침입을 오히려 환영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초반, 불과 보름만에
일본군이 한양에 다달을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 조선 민중들이, 일본군에게
별다른 방해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주된 이유는
일본군의 우수한 화력에 있었지만

어쨌든 일본군은 전쟁 초기에
백성들로부터 박대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군은 승자의 여유로
조선 백성들에게 인심을 베풀었다.

반면에 백성을 버리고 뺑소니를 친 왕과 조정에 분노한 민심이 폭발했다.
몽진하는 선조에게 백성들의 야유가 퍼부어졌고, 인빈의 가마는 백성들의 돌세례를 받았다.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주하자, 분노한 백성이 궁궐을 불태우고 약탈 했다.
궁궐을 불태운건 일본군이 아니라, 분노한 조선백성 이었다.


당시 의병장이 남긴 '쇄미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의병장
"왜군이 쳐들어 왔는데, 아랫 것들은 하나도 안 보이고
오히려 일본군을 환영해줘서 걱정이다."


당시 일본군은 동네마다 양식을 나눠주며
환심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평소 사람 취급도 안해주고 착취나 일삼는
양반네 편에 설 상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예 대놓고 일본군에 가담한
조선 백성들도 굉장히 많았으니

당시 선조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선조
"지금 왜군의 절반이
조선 백성이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

다만 이런 모습들은 전쟁 초반에만 한정됐다.


초반의 승세가 뒤집히고
수세에 몰리면서 일본군은 여유가 없어졌고,


점차 폭력적인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민심은 또 다시 이반하여,


전쟁 후기로 갈수록
일본군에 대한 조선 민중들의 감정은 악화되어 갔다.
ㅎㄷㄷ 통수의 민족

다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시 백성들에게 민족주의나 애국심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민족주의는 20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근대적 산물이다.
왕조시대에는 '왕에 대한 충성'만 강조 되었고, 애국이라는 개념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백성들이 왕에 대한 충성을 버린것이다.
왕의 행렬에 돌을 던지고, 궁궐을 불태워버렸다.



● 포로 중 상당수는 자진해서 일본으로 갔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일본은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끌고 돌아갔다.

그 숫자는 대략 10만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측에서는 5~6만 주장)

이때 남녀는 물론이고
전문 기술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도공, 의원, 화공, 악공, 목공 등
각 부문의 전문직종 종사자들도 많았다.


임란 당시 피랍된 강항이 쓴 '간양록'에 보면
다음과 같이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강항
"적선 6,7백척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고
각 배에는 조선인과 왜병이 반반씩 차지하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는 조선인들의 울음소리가
산과 바다를 울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 전부가 강제로 끌려갔던건 아니었다.
상당수는 자진해서 일본군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유는 이랬다.
전쟁 중에 일본군은 남해안에 성을 여러 개 쌓았는데

이 축성 작업에 동원되었던 조선인들은
대략 10만명에 가까웠다.

그런데 당시 동원된 조선인들 사이에는
이런 생각들이 만연했다.

백성1
"이를 어쩐다냐.
전쟁이 끝나면 양반네들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텐디.."

백성2
"그라게 말이다. 참말로 걱정이구마잉.
분명 왜놈들 도와줬다고,
양반들이 우리 목을 베려고 할텐데.."

백성1
"우리도 왜놈들 따라서 가면 안될랑가?"

때문에 당시 조선인 부역자들 중
상당수가 자진해서 일본군을 따라가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부역자들 (이들은 모두 처형됐다)


또 여기에는 일본군의 부역자로 끌려갔다가
나중에 일본군으로 편입된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더라도
조선 땅에 무사히 발붙이고 살기가 불안했다.

백성1
"이왕 이렇게 된거.
싫어도 왜놈들 따라가야겠지."

백성2
"총을 겨누고 칼을 휘둘렀는데
우리를 그냥 살려둘리가 없어."

이렇게 일본군을 따라간 조선인 포로(피로인)들은
상당수가 규슈 지역의 농노가 되었다는게
학자들의 추정이다.


돌아가기 싫었던 조선인 포로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사절들의 주요 임무는
이들 포로들에 대한 송환에 있었다.

1607년, 1617년, 1624년에 파견된 조선통신사들은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을 데려오겠다는 취지로

이름부터 '쇄환사(刷還使)'라고 지었으니
이는 '끌려간 사람들을 데리고오는 사신'
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1599년부터 1643년 사이에
조선 포로들의 귀환 사례는 총 63건으로

6,323명이 다시 조선 땅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전체 포로 숫자의
10%도 안되는 수치였다.



송환된 수가 적었던 것은
일본 정부의 비협조가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사실 조선인들 스스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던 것도 커다란 이유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이 끝난지 10년, 20년 지나

홀연히 나타나서는
다시 조선 땅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니,

이미 일본 땅에서 기반을 잡고 살아가던
조선인들에게는
오히려 거부감만 들었던 것이다.

당시 쇄환사


이런 자료는 우리 나라 문헌에도 많이 남아 있다.

1617년(광해군 7년)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경직은
'부상록'이라는 문서를 통해 놀라움을 전했다.

이경직
"돌아가자고 하면
얼른 따라올 줄 알았던 사람들이
뭉그적거리며 당최 나서려고 하질 않았다."

그나마 15살 이후로 포로가 된 자는
돌아가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이경직 
"자네들 모두 다시 조선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네."

피로인1
"거참, 난감한데요."

피로인2
"지금 조선은 살림살이가 어떤지요?

피로인1
"내가 떠날 때만 해도 전쟁으로 난리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괜찮은건지?"

하지만 그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이미 일본 생활에 동화가 되어
돌아갈 뜻이 전혀 없음을 밝혔다.

피로인3
"싫은데요. 전 안 갈꺼에요.
조선 땅이라고는 기억조차 없어요."

피로인4
"거기 가면 뭘해요?
아는 사람 한명도 없는데요."

이랬던 것이다.

물론 양반 출신들은
도망을 쳐서라도 적극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포로로 붙잡혔다가 탈출한 정희득이 쓴
월봉해상록에서는

한때 양반 출신으로 있다가
땔나무꾼 신세로 내몰린
조선 포로들의 한숨서린 얘기들이 나온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인구 구성만큼
포로 중에서 양반의 수는 10% 남짓으로 적었고

90%는 돌아가봤자
천대받는 양민과 노비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돌아가려는 생각이 있는 자들은
일본에서 날품팔이꾼으로
경제적으로 고생하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피로인1
"정말 가면 땅 주고, 집도 주는건가요?"

하지만 사는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피로인2
"조선에는 양반들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가봤자 살기 힘들어요."


● 다시 돌아가서 노비로 살라는 말인가?

여기에 일본의 영주들은
겁을 주고 회유를 했다.

다이묘1
"조선으로 돌아가면 너희들은
죽거나 유배를 당한다능. 속으면 안됨."

다이묘2
"거기 가서, 평생 노예신세로 지낼 바에는
여기서 그냥 평범하게
농노로 지내는게 훨씬 낫다니깐."

이와 비슷한 기록은, 당시 일본 통신사로 간
강홍중의 '동사록'에서도 나온다.

"붙잡혀 온 사람들은 처음에는 맨손으로 왔지만,
십년 가까이 지내면서
재산이 늘고 생활이 편해져서
좀처럼 돌아가려는 이들이 없었다."

여기에 확인되지 않는 루머도 나돌고 있었다.

피로인1
"앞전에 조선으로 귀환한 사람들 모두가
관원들의 노비가 되었다지 뭔가."

이런 소문이 퍼지자, 일본 현지에서
이문창이라는 조선인은 이렇게 한탄했다.

이문창
"조선에 돌아가도 좋을 건 하나도 없구나."

그러자 귀향하려는 숫자는
더욱 줄어들게 되었다.

여기에 조선이란 신분 사회의
완강한 도덕적 가치관을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피로인1
"양반들이란 작자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우리가 왜놈들 도와서
총질을 하고 부역을 했던 과거를 덮어둘까?"

피로인2
"그러게, 우리가 살아봐서 알지 않는가!
왜놈들 포로라는 꼬리표만 평생 따라갈꺼구만.."

이런 이유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이후 처벌이 두려워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요네타니 히토시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비꼬기도 했다.

요네타니 히토시
"조선이 포로 송환에 집착했던 것은
국가의 체면 때문이지
포로들이 불쌍해서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그런 포로들의 불안감을 이해하고
이례적으로 혜택을 베풀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구가 대폭 줄어서
한 사람이라도 아쉬웠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실록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의 죄를 사해 주고, 부역을 면해 주고,
노비들은 신분을 해방시켜 주고,

호구지책을 완벽하게 해줘서
고향으로 돌아가 무사히 살도록 했다.

때문에 쇄환된 자들은
모두 친족들과 만날 수가 있었고
다시 조선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소식들이
제대로 일본 땅의 포로들에게 전해질 리가 없었다.

만약 전해지더라도
조선인 포로들은 쉽지 믿지 않았을게다.

한마디로 조선이라는 봉건제 사회가 만든
자업자득이었다.

추천 반대
twitter facebook
165,592개(7670/8280페이지)
리프레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추천 날짜
공지 "리프레쉬" 게시판 안내 캠퍼스타운 50249 1 2014.09.17